해리성 둔주의 큰 특징은 기억 상실과 또 다른 정체성의 가정이다(사진=셔터스톡) 
 

1926년 12월 3일, 추리작가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가 영국 버크셔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서 사라졌다. 그는 사라지기 전 남편인 아치 크리스티와 다른 이들에게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남겼다. 한 메모에는 자신이 단지 요크셔로 휴가를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메모에서는 자신의 삶이 두렵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1,000명 이상의 경찰력이 이 사건에 배정됐다. 또한 1만 5,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크리스티의 수색을 도왔다. 최초로 항공기가 수색에 참여하는 일도 벌어졌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실종된 다음날 그의 차는 잉글랜드 남부의 서리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지역은 크리스티의 소설 속 캐릭터 중 한명이 익사한 사일런트 풀이라는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발견된 차 안에는 여행가방과 각종 소지품, 모피 코트, 그리고 유효 기간이 지난 운전 면허증이 들어있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같은 사태에 일부 사람들은 크리스티가 익사했거나 자살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해로게이트에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심지어 크리스티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더욱 기묘한 점은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테레사 닐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호텔에 체크인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호텔에 머무는 동안 의혹을 불러일으킬만한 행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심지어 대중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자신이 사라진 동안 했던 일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남편인 아치는 크리스티가 자동차 사고로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향후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일종의 정서적 도피 상태에 보다 가까울 것으로 추정됐다.

이 장애는 외상성 사건으로 야기돼 최대 몇 개월 동안 지속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할 수 있다.

특히 기억 상실과 또 다른 정체성의 가정이다. 크리스티의 경우 신문 사진에 실린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며 새로운 인격체를 형성했는데, 이는 그가 해리성 둔주에 빠졌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 증거가 된다.

해리성 둔주의 원인과 증상

둔주(fugue)라는 용어는 '비행(flight)'을 뜻하는 라틴어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있다는 해리성 둔주의 근본적인 의미가 반영돼있다. 통계에 따르면, 이 상태를 겪는 총 인구는 약 0.2%로 매우 드물다. 아동에 비해 성인에게도 더 흔하게 나타나며, 해리성정체장애로 진단받은 이들에게서 보다 잘 발생한다.

이에 이같은 증상을 가진 이들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충동적으로 집이나 직장에서 방황하거나 아예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해리성 둔주의 지속 기간은 보통 몇 시간 혹은 며칠, 아니면 몇 달이나 최대 몇 년 이상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데, 극도의 정서적 스트레스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잘 발생한다. 재난의 목격이나 경험, 사고 및 학대, 전쟁 혹은 극단적인 폭력 등의 다양한 외상적 사건들의 결과일 수 있다. 

해리성 둔주 치료는 정체성 회복을 돕고 상태를 야기한 트라우마를 대처하는 데 목적을 둔다(사진=셔터스톡)
 

이에 전문가들은 해리성 둔주가, 다루기 힘들거나 대처하기 힘든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이라고 표현한다. 이외에도 수치심이나 당혹감, 고문, 유년시절 장기간의 정서적 및 육체적 학대, 납치 등이 해당될 수 있다. 이들이 잃어버린 기억의 유형은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ies)으로 불린다.

해리성 둔주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증상들은 보통 기억이나 정체성에 관한 것들인데, 과거에 대해 확신하는 못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의 느낌 등이다. 또한 둔주 상태가 끝났더라도 슬픔이나 분노, 우울, 불편함, 분노, 그리고 마치 시간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 증상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병력과 신체검사를 수행해야 한다. 다른 실험적인 테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혈액 검사나 뇌파도 검사, 신경 영상 검사 등도 필요할 수 있다.

해리성 둔주 다루기

질환의 희귀성으로 인해, 해리성 둔주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치료법은 없다. 다만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체성 회복을 돕고 대처 전략을 개발하는 것과, 이 증상을 촉발시킨 원래의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대처하도록 돕는 등의 두 가지 목표를 치료법에 반영한다.

치료에는 안전한 환경 조성을 비롯한 외상 이전의 삶과의 재연결, 정상적인 삶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 원래 상태를 야기한 트라우마를 발견하고 처리하며 관리하는 것, 그리고 관계 강화 및 향상 등 방법이 활용된다. 이에 인지행동치료나 심리치료, 변증법적 행동치료와 같은 여러 종류의 치료법이 동원될 수 있다.

다만 까다로운 점은 해리성 둔주가 즉시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증상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이에 때로는 둔주 이전의 정체성으로 갑자기 돌아올때까지도 증상이 진단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환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이에 가족의 지원과 도움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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